김일성에 대한 최초의 반역 "8월종파사건"

김일성이 육이오전쟁의 책임을 핑계로 무정 등의 팔로군파, 박헌영의 남로당파, 허가이의 소련파를 숙청하여 쟁쟁한 독립투사출신 정치세력을 전멸시킨 이후, 김일성은 나름대로 경제건설에 힘쓰며 또한 1인독재체제의 확실한 구축에 힘쓰고 있었소. 그러나 국제-국내적 상황은 그다지 김일성에게 호의적이지 못했소.
1956년 일어난 반역사건 "8월종파사건"은 그 결정체라 할수 있을 것이오. 당시 북한 내부에서는 김일성 1당독재체제에 염증을 느껴가는 정치세력들과, 스탈린의 죽음으로 스탈린주의(스따린이 변형시킨 공산주의 방법론)를 고집해오던 김일성의 입지 축소, 스탈린주의식 집단경제의 무리한 적용으로 인한 상거래금지, 사유재산금지, 협동농장신설로 국민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가고 있던 시절이었소.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4.19 직전과도 비슷한 상황이었소.
이러한 국내정세와 스탈린주의의 전면 비판에 나선 흐루시초프가 이끄는 소련의 태도, 김일성독재에 염증이 난 정치세력에 힘입어 그동안 숨죽이며 살아왔던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을 계획을 세우게 되오.
마침 당시 김일성은 제1차 경제5개년 계획의 추진을 하려 하고 있었소. 그런데 박통초기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자본도 기술도 없는 상황이라,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기술과 자본을 공산주의 동맹국으로부터 들여와야만 하는 상황이었소. 따라서 김일성은 동유럽과 소련을 순방하는 차관 외교를 결정, 출국하였소.
이때 연안파의 주 반동세력은 김두봉(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최창익(당 정치위원 겸 부수상), 윤공흠(상업부장), 서휘(직업총동맹 위원장), 이상조(주 소련대사), 이필규(내무성 부부장), 장평산(제4군단장) 등이었고, 소련파로써는 박창옥(당 중앙위원해 부위원장 겸 부수상) 김승화(건설부장), 박의완(부수상), 김재욱(농업부부장)이었소.
이들은 김일성이 일시 출국한 틈을 타, 김일성의 개인숭배 스따린주의를 비판하여 소련의 협조를 얻어 김일성을 축출하고, 소련및 동유럽국가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아 경제발전을 이룩하면 인민들도 자기를 지지할 것이고 스따린주의를 철폐한 자신들을 소련이 잘 봐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소.
김승화가 주 평양 소련대사관과 접촉, 주 소련대사인 이상조도 동의, 소련대사관 참사의 동의를 얻었으나, 주 평양 소련대사관 참사가 최창익과의 담화 내용을 최용건에게 보고, 이것은 즉시 김일성에게 전달되었소. 연안파세력중 하나인 이상조는 개인숭배 실태를 소련에 보고하여, 김일성은 흐루시초프 면전에서 "김일성의 스탈린주의적 성향"에 대해 비판을 당했소. 이에 그치지 않고 이상조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도 김일성을 비판하는 내용의 서신을 발송, 김일성은 위기에 몰리게 되었소.
이에 김일성은 급히 귀국할 수밖에 없었소. 반동세력들은 김일성의 외교성과를 발표하는 당 전원대회에서 발의안을 내걸어 김일성 축출을 행할 예정이었소. 1956년 8월 30일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예정대로 최창익과 윤공흠이 김일성 독재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나, 이미 모든 정보를 꿰고 있던 김일성파는 군대를 동원하여 저지, 일부 주모세력은 중국으로 도주하고 체포된 나머지 반동세력에 대해서는 탈당-폐직 처분이 내려졌소.
이에 소련에서 미코얀, 중국의 팽덕회가 급히 내방하여 사태를 수습했고, 이윽고 9월 전원회의에서 탈당-폐직처분을 취소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소. 그러나 반동 세력들은 다음해 국가반역음모죄라는 덤테기가 씌워져 모조리 숙청되었소. 그 다음해에는 연안파의 거두였던 김두봉과 국립도서관정 한무까지 숙청, 연안파는 이로써 완전히 전멸하게 되었소.
김일성으로써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으나, 오히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김일성 1당독재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준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 4.19로 타파되었던 구정치세력은 끝끝내 살아남아 김씨왕조를 창건하게 되고 말았던 사건이었소.
posted by 충성용감단결 at 5/04/2006 09:41: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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